[헤럴드경제] 극동지구 여성비행사기구 김경오 총재의 인생스토리

ACEF 10-06-25 18:47 4,069회
“각하, 여성은 애국하면 안됩니까…눈물로 호소했죠”


“공군 소위 김경오 50611, 명(命) 비행훈련, 사천비행장.”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이었다. 지난 3년간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경례도 하지 않았던 군인들이 말을 걸었다. “김 소위, 축하한다.” 그때 나는 비로소 전우애가 무엇인지, 우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전날 공군 참모총장이 나를 불렀을 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무슨 얘기를 할까…. 그런데 총장은 “자네가 꼭 전투기 조종을 해야만 군대를 나가겠느냐”고 물었다. 나가겠다고는 하지 않고 꼭 조종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조종을 못 하게 되는 것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죽어서 나가면 모를까, 살아 있을 때 조종을 해야겠습니다.”

군인은 울면 안 된다고 하는데, 눈물이 흘렀다. 내 팔자가 기가 막혔다. 울면서 나는 외쳤다. “각하, 여자는 애국하면 안 됩니까!” 놀란 총장이 나를 맹랑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리고 하루 만에 비행 명령이 떨어진 것이었다.


女비행사 만든다 뽑아놓고 잔심부름만 시키던때


‘죽기살기로 조종대 잡겠다’각오로 고된 훈련 소화


美유학후 민간항공 발전·여성 지위향상에 앞장


수백명 후배 조종사 배출…그 맨앞자리엔 그녀가…


우리는 대한민국의 여성이다

사천에서의 훈련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과연 여자가 하기엔 어려운 일이었구나. 48㎏밖에 안 되는 나에게 낙하산과 총은 너무나 무거웠다.

1949년,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입대하고 3개월 만에 6ㆍ25 전쟁이 났다. 군인으로서 목숨을 버릴 각오가 돼 있었지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이 여자 비행사를 만든 이유는 대한민국이 일제치하에서 독립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홍보용이었다. 유명 여고에서 이공계 과목 점수 85점 이상의 용모가 단정하고 건강한 여학생을 모집했고, 그렇게 뽑힌 15명 중 하나가 나였다.

후보생으로 입대해 3개월간 훈련을 받고 군인이 됐다. 대통령 앞에서 우리는 선서를 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여성이고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 나라를 위해서 산화하는 것을 영예로 안다.”



그러나 산화는커녕 밤낮 전투기 정비, 기상 상황 보고를 하는 게 일의 전부였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전투기 조종인데…. 참모총장에게 사정도 해봤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럴 때 돌아오는 답은 “자네 하나 때문에 모든 게 불편하다”는 것뿐이었다. 그 와중에 입대한 15명의 여학생 가운데 장교로 진급하지 못한 13명이 제대하고 한 사람은 시집을 갔다. 유일한 여군이 된 나에게 참모총장은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나는 당돌하게도 “대통령 각하의 뜻을 따라서 군에 왔고 열심히 했습니다. 내가 여자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없지 않으냐”고 맞섰다.

50시간의 단독 비행 명령이 떨어진 건 1952년 5월 11일 봄이었다. 머리카락과 손발톱을 정리해 종이에 싸서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는 얼굴이 빨개지시더니 “뭔지는 모르지만 내가 펴보지는 않을게”라고 하시고 주머니에 넣으셨다. 나는 어머니를 꼭 안았다. 다음날 오전 10시. 전쟁통에 굶어 죽은 사람들이 널려 있는 대구 동명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탔다. 아무 감각이 없었다. 죽을 것만 같았다. 파워를 넣었는데도 비행기는 왜 안 뜨는지.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비행기는 이미 떠 있었다. 1000피트를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면서 38분간 묘기를 선보였다. 정신없이 착륙을 하자 플래시가 터졌다. 내외신 기자들이 소감을 물었지만 울고 싶은 생각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기쁩니다” 따위의 말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아름다운 한국의 공군 대위

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자 이승만 대통령이 나를 불러 미국에 가서 민간 항공기술을 공부하고 오는 게 어떠냐고 했다. 1957년 나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그린즈버러의 미 공군기지와 가까운 길퍼드대 항공운항과에 입학했다. 영어라고는 한 마디도 못했던 나는 3개월간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했다. 식당이 어디인지, 식사시간은 언제인지 알 수가 없으니 무조건 굶을 수밖에 없었다. 교문 앞 슈퍼마켓에서 바나나 하나씩을 사먹는 게 전부였다.

보다 못한 학교는 한국에서 온 ‘특별한 학생’인 나를 랭기지스쿨에 보내서 영어를 가르쳐줬다. 그래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돈은 등록금을 내고 나니 없었다. 기숙사비를 내려고 세탁일을 하고 교내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았다. “공부 끝나면 스테이(stay)하지 말고 꼭 돌아와서 후배들을 양성하라”는 대통령의 말 한 마디를 생각하면서 죽을 고생을 했다.

고생뿐이었던 내 삶을 180도 바꿔놓은 건 돋보기를 끼고 군화를 신은 한 남학생이었다. 잡초를 뽑고 있던 내가 “사우스 코리아(South Korea), 에어포스 루테넌트(airforce lieutenant)”하자 그 학생은 “나도 한국전쟁 때 공군에 있었다”며 반가워했다. 교내지 편집국장이라는 그와 한 인터뷰는 노스캐롤라이나데일리를 거쳐 중앙방송국까지 알려졌다. ABC방송의 퀴즈 프로그램에 초청받았고 타임, 뉴스위크, 라이프매거진, 리더스다이제스트에 내 인터뷰가 실렸다.


여자 비행사를 만들다

유명인사가 되자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전국을 돌며 강연을 했고, 미국의 항공 관계자들과 교분을 쌓았다. 학교를 졸업할 무렵이 되자 미국 비행기를 한 대 사가지고 귀국해 여성 후배들을 가르치겠다는 결심이 섰다. 미국 여자비행사협회장을 찾아가 몇 번을 부탁해 ‘김경호 후원회’를 만들고 3개월17일 만에 비행기를 사고도 남을 거금을 모았다. 경비행기회사는 훈련용 경비행기 ‘파이퍼 콜드’를 무상으로 주고 군함에 실어 인천까지 보내줬다.

1963년 10월 30일 여의도비행장에서 나는 귀국 비행을 했고, 김상희 함광란 두 사람의 단독 비행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여자 비행사를 양성하겠다는 생각은 누구도 하지 않았다. ‘내 힘으로는 안 되겠다. 여성의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화여대 김활란 박사를 만나 여성이 공동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데에 의기투합하고 여성단체협의회 이사로 들어갔다. 여성항공협회를 만든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1988년 여성단체협의회장에 당선돼 6년간 일하면서 맞은 제14대 대통령 대선은 중요한 기회였다. 당시 후보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서 “공군사관학교에 여자를 뽑아라. 그러면 여성들이 몰표를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대통령은 약속대로 당선되자마자 공군사관학교에 매년 20명씩 여생도를 입학시키도록 했다.

13년이 지난 지금, 항공은 여성의 진출이 가장 활발한 분야 중 하나가 됐다. 매년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할 때마다 1등으로 졸업하는 여생도가 있고, 여자 공군전투기 조종사는 이제 10명이 넘는다. 수송기, 헬기를 포함하면 몇백 명의 여자 조종사가 나왔다. 민간에선 각 항공사의 사무장, 이사 자리에 여성들이 진출했다.

이들의 맨 앞에 김경오가 있다.



<김경오는 누구>


대한민국 최초 여성 공군 조종사


컬러링도 애국가 여전한 나라사랑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김경오(76) 극동지구 여성비행사기구 총재에게 전화를 걸자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김 총재의 휴대전화 벨소리와 통화연결음은 애국가다.
“애국가를 벨소리, 통화연결음으로 하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다고들 그래요. 제 벨소리 듣고 군 행사 하는 줄 알고 경례했다는 사람도 있었어요.”(웃음)

김 총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군인정신과 애국심으로 무장한 사람이었다. 항공복을 개조해 만든 의상을 입고 ‘빨간 마후라’를 맨 그는 사진기자가 공군 특유의 이륙 준비 완료 신호를 요청하자 자신 있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김 총재의 유일한 외출복은 50년지기인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직접 디자인했다. 김 총재는 “앙드레는 제일 친한 친구”라며 “3년에 한 번씩 춘하추동 30벌씩 맞추는데 조금씩 디자인이 다르다. 오늘처럼 인터뷰가 있는 특별한 날은 소매에 금박 문양이 들어간 옷을 골라 입는다”고 했다.

여성으로서의 자부심과 후배 여성들에 대한 기대도 대단했다. 그는 “여성들이 자기의 본분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내가 조금 유감인 것은 요즘 여성들이 어디서 조금 뭘 한다고 하면 다 정치로 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정치도 중요하지만 각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나가는 게 여성들의 지위가 향상되는 길인데…. 자기가 서야 할 곳을 정확하게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항공 분야에서 여성 인사들을 지원해온 김 총재는 큰딸을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대표적 여성 인사로 키워내기도 했다. 김 총재의 큰딸은 유명 영어강사 이보영 씨다. 김 총재는 “어쩌면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늘 그렇게 공부를 하는 모습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는 국제항공연맹 부총재직과 더불어 극동지구 여성비행사기구의 총재직도 맡게 됐다. 극동지구 여성비행사기구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4개국 여성 비행사들의 교류단체다. 김 총재는 1999~2008년 10년간 국내 42만 민간 항공인을 대표하는 한국항공회 총재를 역임했었다.
“앞으로는 항공스포츠에 지원이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행글라이더, 패러슈트(parachute), 열기구 등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메달을 따고 있는데 올림픽처럼 보상이 있었으면 해요. 얼마나 많은 항공스포츠맨이 있느냐 하는 것도 그 나라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죠.”

김하나 기자/hana@heraldm.com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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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100621000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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