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식량기구 아시아지역 담당 서기관 임형준씨
대학시절 80여개국 돌며 처참하게 사는 이들 목격… NGO·유엔서도 구호활동
1993년 5월 말 파키스탄 산악지역 머리(Muree). 수도 이슬라마바드 북동쪽 50㎞쯤에 있는 이 마을 한 귀퉁이에 한 한국인 청년이 서성이고 있었다. 청년은 배낭여행 중이었다. 근처를 지나던 젊은 경찰관은 외국인이 드문 마을에 나타난 청년이 신기했다. 둘은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경찰관은 영어를, 청년은 파키스탄 말을 할 줄 몰랐다. 경찰관은 손짓 발짓으로 "내 숙소에서 재워주겠다"고 했고, 청년은 경찰관의 허름한 숙소에서 이틀을 머물며 여행했다. 청년은 '너무 가난하게 살지만 정말 인정스러운 사람들, 이들을 내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라는 생각이 머리와 마음을 떠날 줄 몰랐다.
그리고 17년이 흘렀다. 지난 8월 초 파키스탄에서 사상 최대 홍수가 나 2000여명이 숨지고 1000만여명이 이재민이 됐다. 이탈리아 로마의 유엔 세계식량기구(WFP) 본부에 비상이 걸렸다. 현지에 연락해 사정을 파악하고 헬기를 투입해 구호 식량을 전달했다. WFP 본부는 초대형 재난이 발생했을 때 대처하는 매뉴얼에 따라 식량 공급과 지원 계획을 신속히 추진한다. 이 파키스탄 구호 프로젝트의 중심에 17년 전 그 젊은이가 있었다.
오지(奧地)를 여행하던 청년이 WFP에서 오지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전도사가 돼 헌신하고 있다. WFP 본부 아시아지역 공여(供與)국 담당 서기관 임형준(39)씨다. 지난달 19일 고향인 부산을 잠시 찾은 임씨는 "세계 각 정부로부터 식량과 구호품을 모아 홍수로 피해를 입은 파키스탄에 지원하는 업무로 두 달 가까이 야근했다"고 했다. 임씨는 "300만명에 대해 이미 긴급 지원 프로그램을 실행했고, 나머지 700만명에 대한 구호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대학(한국외대 루마니아어과) 시절 80여 개국을 돌아다녔다. 아프리카를 종단하며 내전·가난·질병에 시달리는 난민들의 처참한 모습도 봤다. 그는 "오지 여행을 다니며 정말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가슴에 새기고 이들을 돕겠다는 다짐을 주문처럼 외고 다녔다"고 했다.
1998년 7월부터 두 달은 유엔개발계획(UNDP)이 진행하는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의 집시 빈민가 숙소 건설에 NGO 자원봉사자로, 1999년 9월부터 석 달 동안은 알바니아에서 코소보 난민들 총기 회수 프로젝트에 인턴으로 참가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임씨는 2001년 외교통상부 제5기 JPO(Junior Professional Officer·국제기구초급전문가)에 선발돼 2년 반 동안 중미 온두라스 오지의 식량공급 업무를 맡았다. 차량이 50m 벼랑으로 굴러 중상을 입기도 했다. 이후 유엔 정직원이 됐지만 안주하지 않았다. 2004년 4월부터 2년간은 전기도 없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서아프리카 기니비사우로 달려가 150만명의 국민 중 30만~40만명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프로젝트 책임자로 활약했다. 이어 2006년 6월부터 라오스 근무를 지원했다. 베트남전 당시 라오스와 베트남 국경에 미군 융단폭격으로 뿌려졌던 폭탄 중 불발탄을 제거하고, 농경지와 도로를 조성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험난한 현장만 누비던 그는 보다 체계적으로 배워 현장에 적용하고 싶었다. 2008년 6월부터 1년간 미국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공공행정학 석사 과정을 밟은 이유다.
그는 "지구 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식량이 충분하다. 이를 나눌 간절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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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권경훈 기자 werth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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